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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북악산 전면 개방 당시의 노무현 대통령과 유홍준 문화재청장. /사람사는세상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사퇴했다. 이 박물관 특별전에 친일파 박중양의 글씨를 애국지사 박원근의 글씨로 잘못 소개해 전시했는데, 알고 보니 유 전 관장 본인의 소장품을 ‘셀프 출품’하고도 이를 감췄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대중에게 알려진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2008년 문화재청장(현 국가유산청장)을 지냈다. 나는 당시 문화재청 출입기자였다. 그때 유 청장은 “내 진짜 꿈은 (문화재청장이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유 전 관장의 과거 일화 세 가지를 회고해 보려 한다. [2]는 어느 정도 보도가 된 얘기지만 [1]과 [3]은 거의 소개된 적이 없는 일화인 것 같다. 셋 다 내가 유 전 관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다변가이자 달변가인 유홍준은 문화재청장 재임 당시 잦은 설화(舌禍)를 입었다. 대부분 ‘문화재청장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구설수였다. 아산 현충사에 대해 “이순신 장군 기념관이라기보다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라고 발언하는가 하면, 방북한 뒤 평양에서 북한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효종왕릉 재실 앞마당에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버너 취사를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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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든 방송이든 하루에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총량은 정해져 있거든. 이걸 ‘조짐 총량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그 총량 중에서 상당 부분을 내가 가져가니 다른 사람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신문은 면수가 정해져 있고 방송도 뉴스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정부 비판의 분량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다. 유튜브에서 어떤 사안을 계속 비판할 수 있는 요즘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그럴듯해 보이는 얘기였다. 그런데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저 얘기를 본인이 웃으면서 해도 되는 건가? 결국 아무리 구설수가 일어나도 별 타격감이 없다는 얘기를 유쾌하게 표현한 것이었는데, 본인은 어떤 경우에도 잘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지닌 것 같기도 했다.
문화재청장 시절의 유홍준 전 관장. /조선일보 DB
2004년 10월 31일, 유홍준 청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창덕궁 후원을 거닐며 3시간 넘게 독대했다(물론 경호원은 있었겠지만). 마침 정조 임금이 세운 창덕궁 규장각이 보이자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보기에 대통령님께선 정조 임금과 비슷한 。이 많습니다.”
노무현이 웃으면서 “제가 어떻게 감히 정조와…”라며 당치 않다는 말을 하자, 유홍준은 이렇게 말했다. “첫째,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둘째, 수도 이전을 하려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정조는 수원, 노무현은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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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정조가 소장 학자를 중시한 것은 대통령님께서 각종 위원회를 세워 학계의 의견을 중시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 얘기를 기자들에게 들려준 유홍준은 얼마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광화문 현판 글씨를 내리고, 정조 임금의 글씨로 바꿔 달겠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를 ‘노무현’으로 교체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유홍준은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 사건 직후 청장직을 사퇴했지만, 어차피 곧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교체될 수순이었다.
2018년 9월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촬영한 유홍준(왼쪽에서 둘째)과 가수 알리(맨 왼쪽). 작곡가 김형석과 축구 스타 차범근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은 당시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특별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김형석 인스타그램
세월이 흘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홍준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6월 교육부 산하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이사장이 됐고, 이걸 윤석열 정부 때인 2024년 6월까지 만 3년을 했다. 다만 한중연의 대표는 이사장이 아니라 원장이다. 유홍준의 그 3년은 이례적이라 싶을 정도로 조용히 지낸 기간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시국 초기였으며 그가 한중연 이사장이 된 직후인 2020년 7월의 일이었다. 그보다 며칠 전 ‘미션’ ‘시네마 천국’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가 별세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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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지방으로 가는 KTX에 앉아 있었는데, 웬 키 크고 머리가 허연 낯익은 사람이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유홍준이었다. 행선지는 달랐지만 우연히 같은 차량 옆자리 표를 끊었던 것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그가 자기 휴대폰을 꺼내 뭔가 캡처한 화면을 보여 줬다.
그것은 며칠 전 유홍준과 친분이 있는 가수 알리가 보낸 메시지였다. 유홍준과 알리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 특별 수행원 자격으로 함께 방북했던 인연이 있었다. 알리는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리코네 별세 소식을 듣고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유홍준은 이런 답신을 보냈다.
<내가 모리코네하고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그러자 알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대가시잖아요.>
며칠 전 국정감사장에 나온 유홍준의 모습은 ‘조짐 총량의 법칙’ 운운하며 파안대소하던 20여 년 전의 그 모습이 아닌 듯했다. 이제 77세인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다. 안쓰럽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만약 그가 정말 스스로를 대가(大家)라 여긴다면, 이제 그에 걸맞게 구설수 같은 것에는 오르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아래 얼굴 사진 오른쪽에 있는 ‘구독+’를 한 번 눌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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