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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는 오늘도 눈을 비비며 허겁지겁 출근길에 오른다. 달리고 또 달리지만, 지각이 일상이라 팀장의 눈총을 산다. 진상 고객과 언쟁을 벌이고 상사에게도 고분고분하지 않아 찍힌 상태. 그래도 할 말 다 하고 산다. 하지만 별종 취급받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각의 원인은 먼 출퇴근 거리 탓. 직장 근처인 강남 오피스텔을 구하고 싶다. 돈이 모자라 엄마에게 손을 벌리려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며칠간 동네를 떠돌 신세다.
서기 1997년생, 청춘 잔혹사
▲ <97 혜자, 표류기>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주인공은 1997년생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해는 IMF 구제금융의 시간으로 각인된다. 속된 말로 '국가 부도의 해'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최빈국으로 출발한 나라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1세계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호들갑을 떨던 직후다. 충격파는 예상보다 재빨리 수습되었지만, 한국 사회의 풍경은 다시는 그전의 희망과 기대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거대한 후퇴와 침체의 시작이다. 경제 규모는 커지고 국민소득이 늘었어도 체감은 크지 않다.
출생 연도가 제목 맨 앞을 차지하는 건 그냥 들어간 게 아니다. 주인공의 짠 내 가득한 일상은 바로 그 구조적 환경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매일 혼이 나간 듯 거리를 뜀박질하는 혜자에게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동시에 치밀어오르다 문득 그녀의 조건을 되짚어보면 답이 나온다. 강남 한복판 회사에서 근무하지만, 정작 혜자가 몸을 누인 셋방은 인천 구석에 치우친 자리다. 출퇴근에 하루 4시간 허비한다는 말의 실사판이다. 강남 진입은 꿈보다 생존의 문제다.
혜자는 '지방대' 출신이긴 해도 광고 전공이라는 게 작중 대화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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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일한다며 고향에 가면 은근히 꺼드럭대지만, 정작 그녀의 근무지는 콜센터, 정규직 전환은 기약이 없는 계약직의 반복이다. 동료끼리 자조하듯 대기업의 구린 이면을 지탱하기 위한 '욕받이'가 그녀(들)의 역할이다. 고객의 불편을 해결하기보다 그저 미루고 떠넘기는 구조적 모순을 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임금의 대가인 삶, 본질적으로 음침하고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회사 임원은 구세대 '꼰대'의 스테레오 타입 캐릭터를 온몸으로 구현한다. '여자가 어디서 담배를!' 시대착오적 대사를 입에 달고 성차별은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중간에 낀 팀장은 전무 심기 거스르지 않으랴 직원 눈치 보랴 관리직의 고충을 호소하지만,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알량한 권력을 행세하는 데 거리낌은 없다. 세상이 바뀐 줄 알았는데 1997년 이전 가부장제 인습은 여전히 대놓고 꿈틀거린다. 노력으로는 안 되는 게 한가득하다.
부산, 쇠락하는 지방의 초상
▲ <97 혜자, 표류기>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주인공의 고향은 남쪽 끝자락, 한국 두 번째 대도시 부산이다. KTX 타고 3시간 걸리는 머나먼 거리를 상경해 서울에 자리 잡을 때는 지방 탈출의 꿈에 부풀었을 테다. 고향에선 서울에 정착한 성공 사례로 보일 만하다. 실제로 팍팍한 삶에 지쳐도 주인공은 그래도 서울살이를 포기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만큼 부산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고향에서 속 편하게 살고픈 게 인지상정일 텐데 애향심 따윈 약에 쓰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뜻밖의 사건에 혜자는 수습을 위해 엄마 '진숙'과 언니 동생 하던 동네 이모 '희숙'의 도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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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의탁할 친지도 없다. 하지만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충격적인 사실, 이제 '이모' 따윈 없다. 평생 돈 때문에 고생하던 엄마에게 빌린 돈을 떼어먹으려던 악질 채무자만 눈앞에 보일 뿐. 안 그래도 한 푼이 절실하던 주인공은 사채업자에 빙의해 당장 빚을 갚으라 독촉한다. '적과의 동행'이 그렇게 출발한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의 여행이다.
희숙은 돈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벌린다. 액수가 적지 않건만, 이모는 여기서 몇십만 원, 저기에서 백만 원 이런 식으로 푼돈을 탈탈 털어야 한다. 혜자는 한심하다는 듯, 하지만 악착같이 수금하겠다는 눈빛으로 그런 희숙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렇게 둘은 부산의 뒷골목을 종횡무진 누빈다. 온라인에서 부산 오라며 홍보되는 관광 명소와는 동떨어진, 인구 감소와 성장동력 상실에 허덕이는 지방 도시의 남루한 현실이 한가득 펼쳐지는 현장이다.
희숙이 임금을 받지 못한 신발공장에 들른다. 딱 봐도 근근이 버티는 모습이다. 폭삭 망한 부산 제화산업이 자연스레 겹친다. 재래시장 곳곳을 전전한다. 대기업 마트와 온라인 거래에 밀려난 골목의 현실이 사방에 펼쳐진다. 호떡 노。 언니의 남편은 노동조합 활동에 한 몸 바쳤지만, 건강을 해쳐 칩거하는 처지다. 관광지 네온사인에 가려진 빈곤의 풍경이 사방에 넘실댄다. 애초 혜자와 희숙이 살던 동네부터 피난민 주거지이던 '달동네'다. 부산의 뒷골목은 이렇다.
소수자와 여성들의 연대
▲ <97 혜자, 표류기>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물론 부산은 현세에 강림한 지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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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을 제외한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이 부산과 울산을 잇는 동남 해안지대다. 아예 인적조차 드물다는 '지역 소멸' 위기의 농촌보다는 형편이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닥 아래 더 바닥이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수도권 빼면 현재 한국 사회 전반이 처한 심각한 현안이란 .에서 구조적으론 별반 차이가 없는 건 엄연한 '진실'이다. 그래도 만리타향 서울로 떠나는 것만이 해답일까? 질문이 돌아올 법하다.
청년세대가 떠나려는 건 망해가는 동네의 형편 때문만은 아니다. 지방 청년들에게 설문하면 과반은 여전히 '일자리만 보장되면 고향에 남고 싶다!' 말한다. 하지만 그 일자리는 좀 제대로 된, 최소한의 기준과 합리성이 전제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속 부산의 풍경은 그것과는 까마득히 거리가 멀다. 물론 '특별시'라고 해서 서울이라고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긴 하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데! 빽 소리라도 질러볼 서울, 시간이 멈춘 듯 봉건적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가 숨 쉴 때마다 쏟아지는 부산의 비교는 선명하게 관객에게 각인된다. 편의。 근무에 최저임금 보장도 안 되는 불법 비율은 지방으로 갈수록 확 높아진다. 실정법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찌 보면 '야만'에 가까운 실태가 지역에선 공공연히 벌어진다. 청년 세대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견뎌볼까 하면, 지역 사회의 기득권을 쥔 기성세대는 이를 내주지 않는다. 서울이라고 딱히 다를 바 없긴 하지만, 부산과 서울의 온도는 확연히 다르다. 불이익 감수하고 질러볼 틈새라도 상상하는 서울 vs. 벽 보고 소리치는 심정인 부산의 극명한 대비 속에 누군가는 체념하고 누군가는 떠날 뿐이다. 조직폭력배를 방불케 하는 횟집 사장과의 실랑이는 극적 클라이맥스이자 (부산시 관계자라면 반드시) 감추고픈 장면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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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이 폭력의 전시는 그동안 따로 놀던 지역 여성들이 처음으로 살아남기 위해 동맹하는 계기가 된다. 거창한 연대 운운할 때가 아니다.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자연발생적 연대다. 당장 물리적 폭력 앞에서 서로를 지켜야 하니 말이다. 건장한 남자의 폭력 앞에서 개별로는 역부족인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면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의식적 노력보다는 때로 손쓸 틈 없이 닥친 상황 해결 과정에서 저절로 갈등을 초월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지역 영화'의 현주소
▲ <97 혜자, 표류기>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몇 차례의 변곡.을 거치며 혜자와 희숙, 뒤늦게 합류한 고향 친구 '현선'의 '표류'가 마무리된다. 물론 뜻밖의 행운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야기를 따르다 보면 해피엔딩의 희망은 눈 녹듯 관객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겉으론 여전히 남루한 일상만 그녀들 앞에 내일도 모레도 펼쳐질 게 뻔하다.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만 한다. 혜자는 다시 상경하고 희숙은 구차한 나날을 거듭하며, 현선 역시 물려받은 횟집에 묶여 변함없는 나날을 이어갈 테다.
하지만 실체는 좀 다르다. 아무것도 겉으론 변하지 않아도, 함께 표류하며 동고동락한 이들의 삶은 작게나마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게 '로드무비'가 존재하는 이유다. 일반적인 로드무비와 달리 밀폐된 자가용이 아니라 두 발과 대중교통에 의지해 길바닥을 헤매는 여정은 반드시 특별한 뭔가를 남긴다. 지갑에 돈은 없어도 서울에선 차갑게 식어버린 소소한 인정을 목격하고, 초라한 밥상이나마 기꺼이 밥 한 공기 내어주는 소박한 우애가 '고향'의 향수를 풍긴다.
혜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비호감 캐릭터에 머문다. 그녀는 30년 인생을 유리천장 깨기에 바치듯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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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듯 주인공은 끝없이 부딪히고 소리치며 불합리와 싸운다. 하지만 뾰족한 성과는 없고 주변에서 기대한 호응도 얻지 못한다. 욕을 입에 달고 사니 주변에서 오히려 사고뭉치 민폐 캐릭터 취급받을 뿐이다. 하지만 대척。에 선 직장 동료 '정희'라고 사다리를 올라 '신데렐라'가 되진 못한다. 둘의 생존법 비교가 관전 지。이다.
<97 혜자, 표류기>는 드러나는 결과로만 따진다면, 최서해의 '탈출기' 21세기판에 가깝다. 물론 절대적 기준에서 상대적으로 빈곤과 불합리가 이행되긴 했다. 일제의 강。과 무단통치에서 이제는 자본주의 차별과 그에 빌붙은 온갖 차별이 새로운 '계급'을 형성한 상태에서 그 밑바닥에 처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관객 각자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 한국 영화 주류가 단지 풍경으로만 소비하던 지방의 속살을 통해 체감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다.
'지역 영화' 또는 '로컬 영화' 붐이 찻잔 속 태풍처럼 불어온 적이 있다. 매끈한 상업영화 복제에 질린 평단과 관객이 한때 호평했지만, 이 역시 자기복제에 그치며 한국 독립영화가 소모한 주제, 극단적 현실의 상투적 나열의 또 다른 버전 아니냐는 잔인한 평가는 일부 진실이다. 동시에 여전히 건질 구석이 있다는 걸 이 작품은 간절히 호소한다.
영화는 작지만 확실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하려 애쓴다. 세상이 확 뒤집힐 순 없어도 개인의 의지는 가능하단 믿음, 혜자의 영화 속 변화가 현실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작품정보>
97 혜자, 표류기
Drifting
2025 한국 하이퍼리얼리티 생존 브이로그
2026.09.09. 개봉 122분 15세 관람가
감독 정기혁
출연 정은지, 김주안, 이혜, 김강희 외
제작 후앤유아츠㈜ 102CINEMA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 <97 혜자, 표류기> 포스터
ⓒ ㈜마노엔터테인먼트
의 현실이 사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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